정거장

그후

바보어흥이 2014. 4. 21. 13:42

최근 일주일간 나를 만난 사람들이 하는 말을 이랬다.

"너 무지 피곤해보인다" "너 우울해 보인다" "너 힘들어 보인다"

실제로 조금 피곤하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하고, 힘들기도 했지만 그걸 드러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오히려 끊임없이 제정신을 유지하려고 했던 나로서는 조금 의아하게 느껴졌다.
"내가?"

사람들은 오히려 되묻는 게 조금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고 나니 나는 또 내가 진정으로 하는 말을 듣지 못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 '그래 우울할 수도 있지. 세상이 이러니 우울할 수밖에.'라고 잠시 동의했더니 진짜로 드문드문 나도 모르게 정신이 나갈 정도로 우울함이 찾아오곤 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거짓말 없이, 지난 주말의 삶은 정말로 평온했다. 산책, 독서, 간단한 술, 맛있는 안주, 청소, 고양이... 그 속에 일주일만 있을 수 있었다면 내 삶은 다시 회복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정말로 그 속에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것을 꿈꾸며 안온하게 파고들고 싶었다. 그 어떤 책임감도 없이.

 

부러 뉴스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아니다, 뉴스'를' 보지 않았다고 고쳐야 할 것이다.

지난 일주일간 나는 답지 않게 뉴스에 빠져들었다. 지금에서 돌이켜보니 생각난 것인데 20대 초반에도 뉴스와 신문을 열심히 보다가 삶이 너무 우울해져서 그만둬버린 거였다. 감당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내 멘탈은 왜이리 두부인지. 화를 내고 싶어도, 울고 싶어도, 제정신의 잣대를 놓아버리면 안되는데 나는 어느 순간 슬그머니 놓아버렸던 것 같다. 그 분기점은 지금도 어디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고칠 수도 없다.

 

처음으로 일명 '근성'과 붙어 사용되는 '냄비'의 타당한 이유를 찾았다. 그렇다. 망각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 울분이 자신을 좀먹기 때문이다. 그 의미가 옳건 그르건 한 사람이 자신의 그릇에 비교할 수없이 거대한 적을 만나 싸우기 시작하면 그의 삶은 그것에 통째로 제물이 된다. 해내든, 아니든 그것과 별개로.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더 낫게 바꿔왔다고 말한다면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내가 최고의 행복을 느끼는 순간들이 얼마나 허약한 뼈대 위에 근거하고 있는지, 이를 테면 나의 주말 파라다이스처럼 말이다. 그것을 떠올리면 내가 잘못 살아왔구나 싶다. 물론 그 사랑스러움을 만들어온 것 자체가 뿌듯한 일이긴 하지만, 나는 과연 그 허약한 뼈대가 무너졌을 때 잡초처럼 다시 살아나갈 수 있는 인간인지 잘 모르겠어서 그렇다.

 

이런 내가 회사에 와서 자리에 앉아서 엄청난 일당을 이렇게 까먹고 있으니 참으로 비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근로 계약을 체결한 자들은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휴일을 즐길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