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싫어한다.
나는 남들이 보기에 별로 싫어하는 게 없는 사람이다. 실제로 나는 20대 때 전 남친의 여동생이 하도 싫어하는 게 많아서 정말 싫어하는 걸 싫어하기도 했다. 그녀는 잘 때 베개가 세 개 이하인 것을 못 견뎌 자러 온 나에게 베개를 하나도 주지 않았다. 하나는 베고 하나는 다리를 얹고 하나는 안고 자야 한다나. 물론 나는 지금도 베개 없이 잘 자는 사람이라 그닥 서운하지는 않았다. 살짝 어이가 없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른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이 시점에서 싫어하는 것이 무언인지 모른다는 것이 인생에 큰 해악을 끼칠 때가 종종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싫어할 줄 모르고 양보하고 배려했던 일들이 나에게 다시 화살이 되어 돌아올 때가 많고 이 경우 원망할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싫어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당당히 고백하기로 했다. 나는 특히 이게 제일 싫다.
남을 휘두르려고 하는 것. 즉 타인에게 자신의 욕망을 강요하는 것. 즉 제어하려고 하는 것. 아주 진력이 난다. 지금 내 주변에 남자라고는 남편뿐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그런 여자들이 몇몇 있다. 엄마도 한 시절 그랬다. 남쪽 친구 둘도 그랬다. 사촌 언니도 그랬다. 모두가 한 시절 그랬거나 다시 그러려고 하거나, 그런 가능성이 있는 주의 요망의 사람들이다. 아마 그녀들이 이 글을 보면 경기를 일으키고 아니라고 소리치며 나를 몰아세워서라도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할 것을 잘 안다. 혹은 흥 하며 무시할 수도. 물론 나는 그녀들을 사랑하고 또 소중하게 생각한다. 가끔 도망이 필요할 뿐이다.
다행이다. '그랬던' 동남쪽 내륙지방의 전 남친으로부터는 고생 끝에 도망쳤다.
며칠 전 자신이 누구를, 혹은 어떤 사상을, 구조를 적으로 삼을지 일찍부터 알아채는 재능 또한 작가의 원천 중 하나라는 단상을 쓴 적이 있다. 내게 나의 적은 대개 사랑 혹은 친밀감인 경우가 많았다. 선생님의 칭찬, 좋은 성적, 애정으로 나를 가까이 두려 했던 몇몇 얼굴들이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차마 그것들을 적으로 삼지 못했다. 그건 빌어먹을 심성이거나 외로움을 두려워한 마음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아빠는 이런 식으로 내 안에 살아 있다. 아빠는 착한 사람이었지만 나를 적당한 무관심과 무한한 신뢰를 버무려 키웠다. 나는 엄마가 종종 내 일기를 훔쳐본다는 것을 아주 어릴 때부터 알았다. 그래서 아빠와 둘이 단칸방에 살기 시작했을 때 나의 프라이버시가 어디까지 허용되는지를 시험해봐야 했다. 그 시절에는 천재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너무나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일기장 위에 머리카락 올려놓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책상 위에 버젓이 일기장을 두고 몰래 아빠를 관찰했는데 아빠는 펴보지 않았다. 몇몇의 시험에 무사 통과한 아빠 덕에 나는 독립심과 자긍심을 은근히 키울 수 있었다.
나는 그의 믿음과 보살핌으로 지금 힘을 낸다. 나는 정말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