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거장

노려보는 눈

바보어흥이 2014. 10. 8. 18:35

파릇파릇한 잔디. 와아아 뛰어나가던 아이들의 무리. 어머니들이 싸준 제각각의 도시락, 혀에 너무나 따갑던 사이다, 아이들을 불러 모으던 유치원 선생의 목소리,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키가 작은 친구들. 내 나이는 당시 다섯 살 정도 되었으려나. 유치원생이었던 것만 기억난다. 어머니는 어린 나를 양배추인형처럼 귀엽게 만들어보겠다며 앞머리까지 뽀글뽀글하게 파마해놓았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때는 더 밍숭맹숭하게 생긴 탓에 나는 전혀 귀엽지 않았다. 정말 촌스러웠다. 어린 아이 치고는 꽤나 외모에 신경을 썼던지 지금도 그 머리가 무척 마음에 안 들었던 게 생생히 기억난다. 두고두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어머니의 선택에 핀잔을 거듭하는 일 중 하나다.

그 소풍날은 내가 무언가를 찾는 것에 그렇게까지 소질이 없는 줄을 처음 깨달은 날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나는 내 방에서, 그리고 내 가방 속에서도 이어폰, 열쇠, 핸드폰, 지갑 등 필요한 모든 것을 수시로 잃어버리고 찾지 못한다. 누군가 찾아줄 사람이 없으면 그냥 포기한다. 찾지 못할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보물찾기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내가 방금까지 열심히 찾다가 지나친 곳에서 ! 찾았다를 연발하며 쪽지를 하나씩 들고 뛰어갔다. 친구들이 찾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저기 있는 것을 못 봤을까 싶을 정도로 잘 보이는 곳에 종이가 있었다. 나무 밑둥이랄지, 나뭇가지 사이랄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낮은 곳 여기저기에 쪽지가 놓여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쪽지를 찾아냈고 그리하여 보물찾기는 금세 막바지에 이르렀다.

허둥지둥 절박한 심정으로 구석구석을 노렸지만 도대체 귀신에 홀렸는지 눈에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점점 마음이 조급해지니 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쪽지를 선물로 교환할 시간이 다가왔고 나는 그제야 엄마에게 찾아가 발견해낸 쪽지가 없다고 울먹였다. 어머니도 황망히 쪽지를(보물을) 찾아보았지만 이미 아이들이 다 가져간 뒤였기 때문에 쪽지가 있을 리 없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선물로 바꿀 쪽지가 없었기 때문에 매우 실망하여 그저 자리에 서 있었다. 어머니는 내 손을 붙잡고 아이들이 줄을 선 곳으로 갔다. 쪽지도 없이 말이다. 어머니가 무엇을 하려는지 몰라 멍하니 서 있는데 어머니가 내 옆줄에 선 여자 아이에게 쪽지 하나를 빼앗았다. 그 아이는 수완이 좋았던지 쪽지를 두 개인가 세 개인가 들고 있었고, 아이에게 하나만 달라고 말을 해도 나눠주지 않자 작은 손에 꼭 움켜진 쪽지 하나를 어머니가 억지로 뺏어 나에게 준 것이다.

아이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그 아이는 할머니랑 온 듯했다. 부당한 일을 겪었지만 일러바칠 어머니가 없었던 것이다. 뒤늦게 할머니에게 무언가 말하는 듯했지만 할머니도 더 따지지 않고 그저 아이를 토닥이는 듯했다. 그래도 그 아이는 울지 않았다. 서럽다기보다는 화가 난 듯 보였다. 나는 무섭고 미안했지만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뻐 나는 어머니의 뒤에 숨어 그 아이의 시선을 피했다. 지금도 그 아이가 나를 노려보던 얼굴이 선명하다. 아주 짧은 머리에 나보다 키가 멀쑥하니 큰 여자 아이. 무척이나 강단 있어 보이는 표정. 자존심이 센 아이. 지금도 그 아이를 떠올리면 마치 내가 드라마 속 악당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가난하지만 자존심을 지키며 꿋꿋하게 살고 있는 여자 주인공을 괴롭히는 잘 살고 재수 없는 여자애 캐릭터. 같은 반도 아니었고 나이도 달랐던지 그 이후로 그 아이를 본 기억은 없다. 그 후로 내가 피해 다녔을지도 모를 일이다.

 

언젠가는 이 얘기를 하고 싶었다. 왜인지 절대 잊혀지지 않는 유년 시절의 기억이다. 내가 얼마나 소심하고 약한 아이였는지, 그리고 스무 살이 되기까지 어디서든 지고, 억울하다고 말도 못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어머니가 얼마나 적극적이고 열심이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약하다는 것은 쉽게 비겁함으로 이어지고, 또 나쁘게 되어버리는 가장 쉬운 일이라는 것. 내가 과분한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살아왔다는 것, 그 사랑을 내가 가진 좋은 무엇으로 조심히 가꿔나가야 한다는 것,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같은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