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를 수 없는Annam by 크리스토프 바타유Christophe Bataille
이 책에 대한 김화영 역자의 개인적인 애정을 느낄 수 있다. 프랑스에 머물면서 서점에 가서 모르는 책들의 첫 페이지를 읽는 기쁨 중 발견한 책인 것 같다. 이방인에 빗대어 천재 작가의 탄생이라고 칭송하는데 내 머릿속에서는 이방인과 그닥 연결고리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스물 한 살에 발표한 첫 작품으로 처녀작 상이라는 이름이 썩 맘에 들지 않는 상을 탔다.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예술을 잘할 것만 같은 프랑스 작품답다. 원어로 읽으면 문장이 정말 아름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한국어판으로도 그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다.
밤의 수런거리는 소리가 땅 위를 덮기 시작했다. 고요한 논들에 하늘이 비쳤다. 숲속에서 짐승 우는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나무들의 넓적하고 무거운 잎새들 사이로 햇빛이 간신히 뚫고 들어왔다. 햇빛으로 인하여 숨막힐 정도로 후텁지근해진 습기가 그 속에 가득 차 있었다.
멀리서 덩치 큰 두꺼비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허연 구름들이 가까운 산들을 밑바닥부터 끊어놓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습기에 젖지 않은 것이 없었다. 습기는 그들의 고독한 몸을 적셨다.
라오스에 갔을 때의 정취로 이 기막힌 묘사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흙색 강, 끈끈하게 달라붙는 습기, 커다란 잎, 쨍쨍한 햇빛 그 모든 것이 동남아의 시골 그대로였다.
긴 항해 끝에 베트남에 도착한 프랑스 선교사들은 베트남의 끈끈한 습기에, 열병에, 전염병에, 풍족하지 않은 먹거리에 계속 죽어 나간다. 프랑스는 시민 봉기로 세상이 역전되어 이들을 잊어가고 베트남 또한 역사의 부침 속에 황폐해져가지만 끝끝내 살아남은 두 원정대, 도미니크 수사와 카트린은 안남에서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잊어간다. 이 과정을 역자는 진정한 자유로움을 획득하는 과정으로 설명하며 그 끝에 남은 것은 맨 몸뚱아리와 순진한 잠이다.
이 책의 묘미는 감수성이 아주 예민할 나이에 느끼고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는 정취와 그 묘사, 또 유럽 인들이 보기에 신비로운 동양이라는 소재 채택, 그리고 건조하고 아름다운 문체다. 꽤 사실적인 시대와 배경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줄거리는 끊임없이 불투명하고 안개에 가득 찬 것 같은 시공간으로 독자들을 끌어당긴다. 그 끝에 말하고자 하는 것은 종교도, 역사도, 명분도, 언어도, 관계망도 모두 다 내버리고 획득한 진실이다. 작가는 아주 고독하고 단순한 동양적인 삶의 진리를 마음 어딘가에 지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