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와 김훈
-그러면서 자신도 굳이 말하라면 ‘중도 우익’이라고 했다. <칼의 노래>의 성공으로 세금도 왕창 냈고, 아들 군대 갔다 왔고. “우익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세상을 책임지는 거야. 좌익과 진보는 세상을 맡을 수 없어. 물적토대가 없으니까. 비참하게도 우리 시대의 물적토대의 역사는 우익이 만든 거야. 좌익이 반항하더라도 우익 토대 아래서 반항한 거라고. 그리고 한국사회의 물적 토대를 건설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야."
(*)내가 강조한 대목들에서 김훈의 기본적인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미 지난번에 김훈의 세계관을 ‘가장(家長)의 허무주의’라고 규정했는데, 그러한 세계관/태도가 여기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물적 토대’라는 건 물론 ‘밥벌이’로 치환될 수 있다. 그리고 박정희는 ‘밥벌이’의 토대를 건설한 ‘가장(家長)’이고(그러니까 여기서 ‘박정희’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보통명사이며 일종의 메타언어이다. ‘이순신’이 그런 것처럼). 이 밥법이란 건 항상 ‘타협’을 전제로 한다(흔히 하는 말로, ‘기분대로’ 직장생활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가장(家長)의 세계란 건 도덕적인 선, 혹은 아름다움에 못 미치는 세계이면서 동시에 그와는 무관한 세계이다. 가장들이 휴일에 주로 하는 일이란 낮잠 자는 것이며, 그들의 주특기는 한입으로 두말하는 것이다(“내가 그랬었나?” “그게 아니고…”). 그런 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부도덕한 가장’이 아니라 ‘무능력한 가장’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다른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적당한 부도덕’은 용인되거나 오히려 ‘능력’으로 인정된다. 이건 아주 상식적인데, “차라리 죽을지언정”을 내세우는 도덕적이고 기개 높은 유전자들은 아름답고 고상할지언정, 굶어죽기 십상이어서 자손을 남기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해서 우리의 ‘성공한’ 조상들은 도덕/명분을 고집하기보다는 가족을 위해서 적당히 불의와 타협도 하고 남을 이용해먹기도 했던 양반들일 것이다. 적어도 남들만큼은.
(*)단, 남들 이상은 곤란하다. “강남에 잘 나간다는 성형외과 의사들이 소득세 50만원 나왔다고 항의하는 사회”는 곤란하다(그런 사회는 부숴야 한다!). 그러니까 우익삼락(右翼三樂)을 누리지 못하는 우익은 우익으로서 자격미달이다: (1)세금 왕창 내고, (2)아들 최전방으로 보내고, (3)질서를 지키고(공공질서?). 한데, (1)세금 왕창 내기는커녕 공과금 내기도 버거운 데다가, (2)(아들 군대보낼 일은 물론 없거니와) 최전방 ‘부근’에서 단기사병(방위병)으로 복무하고, (3)무단횡단으로 두 번 범칙금 낸 바 있는 나는 우익이 되고 싶어도 못되겠다. 근데, 반대로 좌익의 조건은 어떤 건가? 이건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나? 김규항한테 물어봐야 하나? 아님 홍세화?
(*)하여간에 그런 조건이라면, 우익단체에서 자발적으로라도 엄격하게 심사를 해서 우익 자격증이라도 부여하는 게 어떨까 싶다. 그래야 우익으로서 자부심/자긍심을 가질 것 아닌가? 또 그래야지 (1)탈세/탈루를 밥먹듯이 하고 (2)돈주고 아들 군대 빼고 (3)각종 편법으로 국가기강을 문란하게 하는 작자들이 ‘족보’도 없는 우익 행세를 하거나 어중이떠중이들이 그런 작자들한테 일당 받고 우익으로 동원되는 일이 없어질 것 아닌가. 해서, 사이비-우익들만 판을 치는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문제는 좌익의 준동이 아니라 우익의 결핍이다.
(*)김훈의 말마따나, 경험도 없는 ‘아해들’(=좌파들)이 무얼 알겠는가? 우리 사회의 물적 토대, 즉 펀더멘털을 책임지고 있는 건 우익 아닌가? 그러니, 작금의 경제불황도 다 우익의 책임이며, 현정부의 무능도 (그들을 쥐고 흔드는) 우익의 책임 아닌가? 상황이 이러할진대, 비분강개하여 자진(自盡)하는 우익 하나 없는 것은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우리의 우익은 일본의 야쿠자만도 못한 것이다).
“5,000년의 역사를 바꾼 게 박정희야. 가난에서 가난이 아닌 것으로 바꾼 건 단군 할아버지와 맞먹는 힘이야. 우리나라에 차가 돌아 다니고, 고층 빌딩이 서고, 지금 고기를 먹고 있는 것도 그의 덕이야. 그건 사실이고 리얼리즘이야.”
(*)아마도 이런 ‘기성세대’의 마인드가 ‘젊은’ 독자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킬 만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박정희’란 기표는 ‘박정희의 시대’를 가리키는 주인기표이다. 그건 ‘정주영’이라고 바꿔불러도 무방하고, ‘이병철’이라고 바꿔불러도 무방하다. 소위 한국사회의 산업화/근대화라는 ‘물적 토대’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면, "부르주아는 역사에서 매우 혁명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게 ‘사실’이고 ‘리얼리즘’이다. ‘민주주의’란 상부구조는 그런 토대 위에서 가능했던 것. 내가 더불어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런 역사적 ‘사실’과 ‘리얼리즘’이 생물학적/생태학적 사실과 리얼리즘이기도 하다는 것이며, ‘사실’은 ‘당위’와는 또다른 차원이라는 점이다.
-그의 정치적 과오는 어떻게 하고요.
“물론 그런 것까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 리더는 반드시 대중의 뜻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해. 다중(대중?)이 하라고 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 반대로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해. 박정희나 이순신이나 강감찬이나.”
(*)내 생각에 김훈의 착각은 박정희의 ‘정치적 과오’가 그의 ‘치적’과 구별/분리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것까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 하지만, 실상 박정희의 ‘치적’을 낳은 ‘물적 토대’는 그의 ‘정치적 과오’가 아니었을까? 과연 그 시대의 ‘성장 드라이브’가 (‘정치적 무과오’로 가정될 수 있는)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었을까? 성장과 도덕이 양립할 수 있었을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나라에서 우리는 더 잘 살면서 동시에 더 바르게 살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 김훈은 ‘박정희주의자’로서, 그리고 ‘가부장적 마초’로서 불충분하다. 그는 박정희/가장(家長)의 (불가피한) 정치적/도덕적 과오를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는 ‘사실’/‘리얼리즘’을 강조하지만, ‘실재(the Real)’와는 대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어때요.
“노대통령의 마음은 로맨스야. 선한 마음을 담아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거지. 그의 낭만주의야말로 역대 누구에도 없던 아름다움이야. 뜻은 옳고 바르고 도덕적이지만, 그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한 현실적 물적 토대가 없는 거야.”
(*)여기서도 김훈은 ‘아름다움/물적 토대’의 이분법을 쓰고 있다. 그 이분법은 ‘아름다움/책임’의 이분법이기도 하다. 현정부는 아름다운 소리들을 늘어놓지만, 그걸 책임질 만한 ‘물적 토대’가 없다는 비판이다. 이 대목에서 음미해볼 만한 것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이다. 즉 박정희 말기에 은밀하게 추진되다 실패하고 만 핵미사일 보유 시도 말이다. ‘가장(家長)’으로서의 박정희는 군사적/외교적 대미 종속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소리들’이 필요한 게 아니라 ‘물적 토대’(=핵)가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사실, 북한이 미국에 대해서 뻣뻣하게 나오는 것도 그 긴가민가한 핵 때문 아닌가?(물론 실상은 외부의 ‘군사적 위협 요인’에 대한 미국 자체내의 요구가 그런 ‘북한 판타지’를 의도적으로 조장하고 있는 듯하지만.)
>로쟈의 서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