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보다는 덜 재밌는, 그렇지만 그 모든 것 중에 가장 오래 가진 취미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파는 고양이들이 다 긁어 해져버린 싸구려 소파다. 가짜 가죽으로 덮인 2인용 소파에 누우면 머리도 삐져나오고 다리도 삐져나오지만 사지를 잘 구겨넣으면 딱 책 읽기 좋은 자세가 나온다. 베개와 조명만 있으면 완벽하다. 고양이들이 집이나 화장실이나 쿠션을 새로 바꿔주면 싫어하는 이유가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주말이든 평일 밤이든 어떻게서든 나갈 궁리만 하고 살아왔다. 한번은 작정하고 홀로 있어보려고 했는데 세상 전체가 다 나만 빼고 잘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 또한 견뎌보려고 했는데 그 끝에 가서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도통 혼자 있어서 나아지는 성격이 아니다. 그래서 아무리 궁리해도 답이 보이지 않을 때는 사람들을 만난다. 고기도 먹고 차도 마시고 전화 통화도 한다. 그러면 견딜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긴다. 신기한 노릇이다. 매력을 발산하고, 주고받는 과정 속에서 존재를 확인할 수가 있다.
그래도 책은 꼬박꼬박 읽는다. 소화불량으로 쌓아놓고 다 읽지도 못하면서 항상 읽을 것을 찾는다. 일종의 습관이다. 퇴근하여 미드를 실컷 보고도 잠이 오지 않으면 책을 읽는다. 핸드폰만 들고 나서는데 핸드폰 안에 볼 만한 미드가 없으면 책을 읽는다. 멀리 갈 때 책을 챙긴다. 책상에 책을 쌓아둔다. 택배로 책을 받는다. 대단한 이유는 아니고 그저 습관이다. 외동딸이 형제도 없이 재미 있게 시간을 보낼 만한 일이 뭐 그리 있겠는가. 티비도 많이 보고, 아이들과 매번 놀러나갔는데도 틈틈이 책을 읽으며 살아왔다. 신기한 일이다. 그런 습관 때문에 어릴 적 장래 희망란에 소설가를 줄기차게 써왔는지도 모른다. 누구든 어릴 때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권리가 있지 않은가.
역시 읽기 가장 편한 것은 소설이다. 쥐어짜며 이해해야 하는 철학류도 가끔 읽지만 대부분은 반 정도 겨우 읽고 내팽개친다. 최근 읽은 에세이 두편은 동시에 읽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두 개의 상황과 정서가 구분이 안 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둘의 캐릭터와 상황, 철학이 알게 모르게 비슷했다. 60대가 되어 지난 생을 죽 돌아보는 노년의 폴 오스터와 아내를 잃고 혼자 남은 생을 살아가는 줄리언 반스가 묘하게 중첩되는 것이다. 둘 다 노년, 관계, 시간, 고독 등의 키워드를 고민하게 만든 점도 그렇다.
항상 마흔이 두려웠던 것 같다. 지금 보니 마흔이 별 대단히 늙은 것도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아직 젊은 편에 속하는데도 여전히 그렇다. 마흔은 나머지 인생을 목전에 두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책임도, 고독도 함께 따르고 인생의 질곡의 정점에 서 있는 듯한 나이 같다. 이제껏 관계를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추상적으로 어느 곳이든 사람은 있고, 언제든 새로운 관계는 맺을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특히 인생의 동반자에 대해서도 그런 잣대가 가능할까. 20대 중반에 주요하게 깨달은 것은 관계의 전제가 나라는 것이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간다. 가장 의지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잃어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짓궂은 인생이다. 무엇이든 마음껏 해보되 걱정은 나중에 하는 게 좋겠다.
고양이의 체온을 느끼며 소파 위에 몸을 구겨넣고, 이불도 꽁꽁 덮고 책만 읽고 싶은 낮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