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이
빠이는 방비엥을 연상시킨다.
미니밴으로 다섯 시간만 가면 방비엥에 도착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것도 사실이다.
이 작은 마을은 외지인으로 가득하다. 파타야와 다른 점은 코끼리바지를 입은 서양인들보다는 히피스러운 복장의 이들이 많다는 것 정도. 어제 거리에서 자메이카를 상징하는 검정노랑빨강의 두꺼운 머리띠를 파는 것을 보고 매에게도 히피 코스튬을 권해보았다.
젊은 백인들이 가득한 동네. 그들은 종종 맨발로 다니며 젊음과 자유를 뽐낸다. 확실히 동양인과 다른 쫀쫀한 건강함이 있는 그들의 육체는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고 덩치가 크다. 연한 발바닥을 가진 나는 그들처럼 다니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운동화에 숨어든 작은 모래알 하나에도 불편한 노란 인종이다.
밤이면 평택 미군부대 근처에 옹기종기 모인 작은 바들과 닮은 가게들이 조명을 켜고 점점 엉망진창으로 변한다. 젊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서양인들은 붉고 침침한 조명과 낮게 베이스가 울리는 스피커 앞에 서서 저마다 각기 다른 몸짓으로 춤을 춘다. 그들은 작은 동남아 마을에서 방종을 맘껏 누린다. 그와 멀지 않은 곳에 반쑤언 숙소가 있는 탓에 누워 있으면 희미하게 음악 소리가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다.
예술인 마을로 유명한 이곳에서 우리는 그들과 같은 예술적 방종을 느끼기보다 가장 먼저 다름을 느낀다. 우리는 아마 동양인들이 으레 보여주는 조심스러움과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겠다는 단호함을 버리지 않고 이곳에 머물 것이다. 그래도 몇몇 원피스는 눈에 띈다. 이곳이 아니라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화려한 염색으로 뒤덮인 원피스 하나쯤은 가져도 좋을 것이다.
마치 방비엥처럼, 이곳은 치앙마이에 비해 습하다. 음기가 고인 동네가 그러하듯 방 안은 어딘가 차갑고 빨래는 마르지 않는다. 덕분에 방갈로 형태의 우리 숙소는 큼지막한 잎들로 둘러싸여 있다. 마치 정글 속에 있는 기분이다.
어제 도착했을 때 빠이의 하늘은 구름이 낮고 두껍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을 기약하며 숙소 주변을 구경하기 시작했는데 타운이 워낙 작아 한두 시간 만에 저녁도 해결하고 거리 구경까지 다 마칠 수 있었다. 해가 있을 때 도착했지만 날씨가 애매해 본격적인 관광은 내일로 미루고 각자 글을 쓰고 책을 읽는 것으로 저녁을 보냈는데 아니나다를까 새벽 1시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이틀째인 오늘도 분무기로 뿌리는 물 같은 비가 그쳤다 내렸다를 반복하고 있다. 빠이의 유명한 여행 코스는 오토바이로 주변 자연견광을 둘러보는 것이다. 우리 또한 그럴 요량으로 국제면허증까지 준비해왔지만 오전 상황을 관망하다 안 되면 테라스에서 하루 종일 놀기로 했다. 훗날 돌이키면 '우리가 아마 머랭 폭포와 캐니언까지 보고 왔지?' 라고 물어도 '아마 그럴 걸, 아니 거기 혹시 방비엥 아냐?'라고 답할지도 모른다는 농담을 하면서.
이곳 또한 동남아의 작은 마을들이 그렇듯 규제보다는 느슨함을 매력으로 가지고 있어 우리는 치앙마이에서와 달리 테라스에서 마음껏 담배를 피울 수 있다. 빠이가 우리에게 가장 매력을 주는 부분이 바로 이 테라스다. 벤치와 테이블까지 있어 굳이 카페를 찾지 않아도 우리가 찾는 모든 조건을 충족한다. 어쩌면 숙소의 기본은 테라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만족스럽다.
어제부터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를 읽기 시작했다. 훗날 반쑤언을 떠올리면 이 단편들이 주는 정서가 뒤섞일 것 같다. 덕분에 머릿속에서 인물들의 욕망과 줄거리의 메시지를 조금 더 냉소적으로 다듬었다. 모든 단편은 인생의 짧은 한 단면을 도려낸 것 같은 날카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별로 두렵지가 않다. 우린 나름대로 적응할 것이다. 다만 이 한달 간 내가 놓치지 않고 붙잡고 있으려고 노력하는 하루의 모양새를 기억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