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퉁이

인이불발, 당기되 쏘지 않는다

바보어흥이 2013. 9. 23. 16:59

타자성은 일종의 폭력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폭력적인 개입 없이는 필경 공부에 이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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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관념과 그림자의 거울방을 깨고 나가서 실전으로 공부하는 방식을 묻는 일이다. '어떤 틈 속으로 스며든 우연찮은 타자성의 체험'에 자신을 넉넉히 노출시킬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이다. 자기체계의 안정화가 아니라 늘 새로운 변화에 기민하도록 탄력 있는 긴장의 상태를 스스로 부단히 조율해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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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실로 돌이킬 수 없는 '변화'다. 이에 비하면 영리한 것은 '변화'가 아니거나 혹은 기껏 '변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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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난 자기-생각이란 게 워낙 타인을 배제하는 속성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실은 생각이 적어서 공부가 모자란 것이 아니다. 실없이 생각이 많은 데다 결국 그 생각의 틀 자체가 완고한 테두리를 이루는 게 오히려 결정적인 문제다. 이 경우에 전형적인 증상은 냉소와 허영이다. 냉소와 허영이란 타인들이 얼마나 깊고 크게 자신의 존재에 구성적으로 관여하는지를 깨닫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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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의 요점은 '나는 달라요!'라는 지적, 정서적 배치에 있다. 즉, 내 시선 속에 잡힌 남들은 모두 체계 속에서 서로 닮은 채로 엉켜 있지만, 나만은 체계 밖에서 남다른 모습으로 서 있다는 오연한 허위의식이다. 아아, 아무래도 나는 더 깊고 나는 더 순정하다. 지라르(R. Girard)는 이를 일러 '낭만적 거짓'이라고 했는데, 굳이 정신의학으로 치자면 해리장애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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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학인들의 허영은 그 물듦을 은폐하고 실없는 지적 독창성으로 치닫는다. 그래서 "더 큰 이름들에 속하기를 욕망하면서 정작 누구의 '그늘'이라는 말은 지극히 부정적으로 쓰고 있는 상황은 아주 모순적"(문정애)일 수밖에 없고, 심지어 "마치 닮아간다는 것이 고대인들이 터부에 손댈 때 느끼는 두려움의 상태인 양 여긴다"(최성희)는 것이다. ...'나'의 태초에 '너'가 있었다! 

 

김영민의 공부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