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거장

주말도 평일처럼

바보어흥이 2017. 10. 22. 12:39

지난 월요일인가 화요일즈음, 하여튼 주초에 '지난 주말은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아'라고 생각했다. 침대로 가득 쏟아지는 하얀 빛, 노곤한 목덜미, 햇볕에 말려 보송해진 고양이 털. 낮잠. 물론 굉장히 행복한 풍경이었지만 그토록 아끼는 주말이 내용없이 증발해버린 것 같은 아쉬운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이번 토요일 오전에 일어나 거실 테이블을 거실 큰 창쪽으로 붙이고 재작년에 직접 짠 원형 러그를 한가운데에 깔았다. 거실은 동향이라 아침 해밖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해가 테이블 위로 평화롭게 내리쬐었다. 자연스레 오전부터 싸들고 온 교정지를 펴고 조금 일을 했다. 밥을 먹고난 후에는 잠깐 자다가 과외 시간에 늦을 뻔했다. 최근에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물 속에 입욕제를 풀어 몸을 담그는 일, 깔끔한 부엌에서 커피 혹은 차를 내리는 일, 이케아에서 새로 사온 넓직한 쟁반에 고구마며 귤 등 간식거리를 담는 일 등이 좋아졌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사랑하게 된 소소한 습관들이나 공간들을 사진을 찍어 둔다. 평일에 담배 피우며 그런 것들을 본다. 나는 이런 것들을 좋아하고 즐긴다는 것을 다시 증명하려는 것처럼.


서른이 되어서야 슬슬 인생을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을 무의식 중에 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놀아제꼈던 수많은 시간들이 아쉽다고까지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때는 정말 온전히 시간을 사용하는 법을 모르면서도 왜인지 조급했고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시간으로부터 도망다녔던 것이다.


그렇게 기억나지 않는 시간들이라면 그냥 읽거나 쓰거나 외우거나 하는 데에 시간을 사용한다 해도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극단적으로는 주말에 교정지를 가져와서 일을 해도 불만족스럽지 않다. 이전과 달리 일을 해도 소설을 보는 것이라 그렇게까지 긍정적으로 시간을 내어주는 일일 수도 있다. 어제는 첫 과외 수업을 받았다. 언어를 시작하는 일은 호기심으로 재밌기도 하지만 그 방대함을 알수록 두렵고 귀찮아진다. 독학이 아니라 과외를 시작한 것은 내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인데 친구의 제안을 그냥 수락한 것이기도 하지만 뭐랄까 진도를 억지로 훅훅 끌고나가는 일이 과외의 힘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읽고, 쓰고, 무언가를 익혀나가는 일이 좋아진다. 정확히는 그런 순간들이 좋다. 예전부터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은 이런 것이었다. 엄청난 의식이나 각오가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그 자체가 만족스럽다. 매순간과 기분좋은 악수를 하는 하루를 쌓아나간다면 인생이 깊어지지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