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 친구
아빠와 나는 대부분 티브이 앞에 누워 있었다. 내가 학교에 갔다 돌아오면, 아빠가 일을 하고 돌아오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우리는 티브이 앞에 누웠다. 누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티브이 앞에 언제나 이부자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네모난 3평의 방에서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는 것은 나의 매트리스와 아빠의 이부자리였고 그래서 우리는 매번 누워 있었다. 티브이는 다정하고 말 많은 제삼의 식구였다. 아빠와 나는 티브이 덕분에 당대의 유행과 정서를 공유할 수 있었다. 티브이의 소음 안에서 우리는 고독하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함께 웃을 수 있었고 함께 울 수 있었다.
지금을 돌이켜 당시를 생각하면 든든한 친구가 사라진 듯한 상실감이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오른다. 우리는 이제 각자의 집에서 각자의 취향에 맞는 프로그램을 골라 본다. 함께 웃고 함께 울지 않고 먼 곳에서 가끔 재미 있는 콘텐츠를 추천하는 정도다. 아빠가 추천하는 가수, 드라마는 99%의 확률로 성공과 화제를 불러일으킨다. 마치 예리한 대중문화평론가 같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서로가 알지 못했다. 학교나 직장 같은 서로의 외부 세계가 어쩌면 서로에게 유일한 사생활이 되었다. 집이 아니라. 사회라는 세계에서 돌아오면 3평의 단칸방은 마치 자궁처럼 좁고 강력하게 우리를 품어 주었다.
이런저런 어려움에도 아이를 가져야겠다는, 부모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이유는 아빠와 엄마 때문일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사회적인 성공이나 개인의 욕망을 이기는 대단한 존재였다는 사실은 내 근원의 자신감이다. 나는 아빠의 청춘을 쑥쑥 빨아먹고 자랐다. 아빠는 이삼십 대를 나와 함께 보냈다. 질리지도 않고 함께 만화영화를 보아 주었고 놀이공원에 데려갔고 매끼 밥을 해줬고 커서는 드라마 예능을 함께 보아 주었다. 지금 나는 아빠의 삶에 자신감이기도 할 것이다. 삶에 강력한 이유가 있었다는 증거 자체인 것이다. 아빠를 보면 한 사람을 진실로 사랑했다는 사실이 정말 멋진 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