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즈
퓨즈가 나가 버렸다. 오감의 인풋은 가능한데 말도 움직임도 출력되지 않아서 그냥 작동을 멈춰버렸다.
잘 시간이 넘어 버렸고 술을 한 컵 더 시켜버려서일 테지만 상대방의 오랜 감정이 급작스러운 디프레션으로 발현되었을 가능성도 1% 정도 있으리라 본다.
나는 그런데 이제와서 나에게 덧씌우고자 하는 그 감정에 별로 동요가 없다. 내게 일어난 동요는 그저 나는 나일 뿐이고 상대에게 어떤 면에서 먹이를 주고 있었다는 자각뿐이다.
어쨌든 정신상태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어서 보이는 디테일들이 있었다.
머리를 비우자 보이는 것들. 나를 막고 애써 먼저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는 여자를 바라보다가 활짝 웃어 잡힌 눈주름을 보자 갑자기 마음이 사르르 녹아 버렸다. 비슷한 또래 여자들의 얄미운 뒤통수들을 한눈에 보았다. 햇볕 속에 담담하게 서 있는 붉은 벽돌의 신동 빌딩을 보았다.
그리고 젊은 운전사를 보았다. 내가 타는 3011버스는 가끔 순천향대병원 정류장을 지나자마자 육교 아래 버스를 세울 때가 있다. 버스 아저씨들은 항상 급하게 뛰어 나가 화장실을 가시는데 돌아올 때도 매우 서두르는 모양새여서 항상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일하는 노곤함을 느끼게 한다.
파란색 미러선글라스를 쓰고 검은 정장을 입고 있어 순간 나이트 직원처럼 보였다. 어쩐지 버스를 탈 때 내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세게 출발하지 않고 기다렸던 것이 생각났고 밝게 인사하며 승차할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런데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치 내 가족처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차올랐고 왜인지 아이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엄청나게 대단한 무엇이 아니라도 괜찮고, 이렇게 사회의 한 부속이 되어 자기 일을 해나가려는 마음이라면 괜찮다고.
동료가 없어도 어쩔 수 없고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