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sthole

화해하지 못한 화해

바보어흥이 2018. 2. 12. 11:00

한 개인에게 있어 완벽한 옳고 그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옮음의 저변에는 수많은 단서가 있는데 그름의 저변 또한 수많은 저항이 있다. 예컨대 살인처럼 명백한 사안에 대해서라도 나는 살인자 본인의 진정한 회개라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하물며 인간사 크고 작은 갈등 사이에 그것이 가능할까.


인간의 심리라는 것은 참으로 방어적이고 복잡하여 무언가 굴복시키려고 할수록 단단한 막대기가 되어 부러져버릴 뿐 수긍되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이 완벽한 오해와 화해의 플롯이 픽션에서나 가능한 이유다. 웬만치 잘못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용서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를 용서하지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은 채 관계를 종료시켜버리곤 한다. 그런데 내가 주목하고 있는 지점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쯤이다. 누군가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받고 싶다면 먼저 그를 용서해야 한다. 공격과 굴복은 막대기를 부러뜨려버린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단단한 이기주의가 필요하다. 그것은 대부분 남을 배려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자신의 신념이나 명예, 자존심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아마도 상대의 이러한 이기주의를 서로 어느 정도 배려하느냐의 조합이 잘 맞을수록 관계가 매끄러울 것이다. 언제나 자기만이 옳은 사람은 관계에 서툴 것이고, 언제나 상대만이 옳은 사람 또한 기형적인 관계 속에 있을 것이다. 그 균형은 매우 중요해서 특히 10대 시절에 그 알력 관계 사이에서 미묘한 전투가 많이 일어나곤 한다. 어른이 되면 관계보단 생존이 중요해지는 면이 있긴 하지만 이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의 나는 그 부러지지 않으려는 막대기다. 오랜 관계에서 그 균형이 깨짐을 느낀다. 나는 상대를 부러트리지 않고 관계를 이어오려 했다고 생각했지만 상대는 나를 부러트리려 한다. 함께 너무 가벼워지고, 너무 희화화해온, 그 선을 넘어 진심이 왜곡되어버린 순간들까지도 회귀하고 싶은 본능에 휩싸였다. 순간의 희열을 위해 과장되게 웃어넘긴 것들이 오늘의 나를 공격한다. 


한 시점의 매듭, 나는 그렇게까지 자기비하에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지 못한다. 나는 그정도까지 관계를 위해 나를 희생하지는 못한다. 조용히, 그리고 옹고집스러운 사람으로, 신념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으로, 글을 지어내려는 사람으로 되돌아가는 매듭이 지어지려 하고 있다. 조용히 그리고 치열하게 고민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