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네 인생에 불편한 게 없으려고 그러냐."
토토와 구름과 빵을 읽다가 그렇구나 했다.
어제는 쑝이 이 년 전 죽은 날이 17일이냐 19일이냐를 알기 위해 핸드폰 사진첩을 뒤졌다.
18일에 나는 울면서 기요항을 먹고 있으므로 19일이다.
나는 여전히 핸드폰의 3만 장이 넘는 사진첩을 넘나들 때 2022년 11월 19일 근처를 후다닥 뛰어넘는다.
마흔 가까이 살았으므로 이제 슬픔을 잊는 방법을 안다. 자꾸 보고 자꾸 말하고 자꾸 생각하다 보면 슬픔의 알맹이가 멀어지고 희미해진다. 울고 싶지 않아서, 불시에 닥치는 고통을 피하고 싶어서 당시의 사진을 열심히 피해다녔는데 이제는 그 슬픔과 멀어지고 싶지 않아서 잊고 싶지 않아서라는 생각이 든다. 오랫동안 잊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 작은 대가리와 묵직한 무게감, 빼곡한 털, 커다란 눈과 마주칠 때의 애틋함을 최대한 길게 기억하고 싶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내가 육아라는 새로운 세계에 빠져 슬픔에 침잠하지 않도록 7년을 기다려준 것일까. 이 년 후 저를 닮은 노란 새끼 고양이를 한 마리 데려다 놓고 간 것일까.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쑝은 쑝이고 살아 있는 한 모두 죽는 것이고 그 시절은 돌아오지 않는다. 다만 나와 맺었던 관계와 그 속의 변화 같은 것들은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나머지 추측은 사실이든 아니든 무게를 둘 필요는 없다.
타인은 죽음이라더니, 어떤 사기꾼 같은 아저씨가 쑝을 죽일 줄은 몰랐다. 그 죽음에 동조하여 내가 몇 백을 지불할 줄도 몰랐다. 사랑이 때로는 상대를 죽인다. 집착이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만든다. 쑝의 죽음에 약 천만원이 들었다. 평소의 나라면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약간 미쳐 있었던 것 같다. 그것 또한 살면서 벌이는 산 같은 어리석음의 한 일화다.
마지막 장면에 몰두하지 말고 삶 전체를 봐야 한다고, 상실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정말 맞는 말이다. 마지막까지 자연스러웠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래도 마약처럼 강렬한 슬픔에 기대어서라도 쑝을 잊고 싶지 않은 나를 발견한다. 여전히 어리석은 나.
쑝의 재단에서 향을 피우고 종을 울리고 기도를 할 때 나는 쑝이 와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쑝이 너무 먼 곳에 있어서 이렇게 단숨에 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이 든다. 그래도 슬그머니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 바라고 만다. 그래도 될까. 우리가 또 만나도 될까. 나는 다시 너를 사랑하고 너를 죽이지 않을까. 가능하다면 이번엔 반대로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