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은 낭만적이지 않다. 혹독함을 예고라도 하듯, 준비도 채 하지 못한 무방비의 손발부터 얼려버린다. 창문 밖의 사거리를 보아도 어제에 비해 오늘 사람이 더 없다.
집으로 돌아오는 운전 길에는 부러 자세를 곧추세우고 아주 곧은 자세로 앉는다. 퇴근길, 졸다가 차선을 넘어가 아찔한 적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애써 남은 에너지를 아껴 쓰며 돌아오는 길, 겨우겨우 집에 기어들어가는 형편이다 보니 오늘 읽은 책 내용이 귓가를 맴도는 듯했다. 내가 주목한 책의 주제를 하나의 단어로 정의하면 ‘활력’이었다. 좋은 기운을 끌어당기기 위해 재수 ‘있는’ 짓을 해야 한다는 건데 꽤 일리가 있어 재미있다. 미신을 운운하는 게 아니라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흘러가버리는 대단한 재주가 있으므로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지금 골골대고 있는 게 좀 한심하긴 해도, 동시에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밖을 싸돌아다니던 지난 20대 시절이 왠지 정당화되어 뿌듯해지는 기분.
어쨌든 겨우겨우 집에 도착했다. 월요일 오전 4시까지 뒤척인 여파다. 어찌나 잠이 안 오던지. 올해 들어 최악의 불면이었다. 학생 시절에는 잠이 오지 않아 몇 시간이고 뒤척이는 일이 거의 매일이니 불면이라는 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는데 회사를 다니고 나서는 오랜만에 겪는 일이다. 내일을 포기해버려도 되는 나이였기에 가능했다. 질량수면의 법칙을 어기고 산 적이 없으므로, 아침까지 이루지 못한 잠은 내일로 미뤄두면 됐던 시절이었다.
사실 내 방은 웬만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숙면할 수 없는 구조다. 큰 창이 거리를 향해 난, 사거리의 한 모퉁이에 산다는 건 분명 안락한 일은 아니다.
좋을 때도 있다. 가끔 멍하니 사거리를 보고 있으면 그것만한 구경거리가 없다. 빠르게 지나가는 차들, 뒤엉키는 차들, 그리고 하마터면 날 뻔한 사고에 언성을 높이는 사람, 우르르 몰려다니며 으스대는 십대들, 느릿느릿 운신하는 노인들, 스마트폰을 보느라 앞도 안보고 걸어 다니는 정수리들. 그리고 길게 뻗은 길의 사방 끝, 그 위로 펼쳐진 검은 하늘과 흐릿한 구름들. 무수한 시선들로부터 자유로우면서도 무수한 시선들을 구경할 수 있는 위치란 쉽게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아니다. 괜히 뿌듯한 마음으로, 보듬는 마음으로, 장난스런 마음으로 거리를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어우렁더우렁 삶의 한 단편을 멈추어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잠이 오락가락할 때 웽 하고 지나가는 큰 차의 엔진 소리, 80% 이상이 욕지거리인 담배 피우는 무리들의 수다, 바로 맞은편 치킨집의 오토바이 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우렁더우렁이고 뭐고 그냥 싹 다 밀어버리고 싶어진다. 모든 거리의 소음이 머리맡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리는 것이 사거리 모퉁이집의 숙명이다.
요즘은 사람들을 보면 그마다의 스토리를 떠올려보려고 애쓴다. 웃기고 또 안타까운 건 용을 써도 뭐 떠오르는 게 딱히 없다는 것. 로버트 맥키의 말처럼 우리는 이야기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데도, 계속해서 이야기를 보고, 듣고, 말하고,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있는데도 머릿속에 변변찮은 이야기 하나 안 떠오른다. 오늘은 남자 세 무리가 근무시간인데 거리 벤치에 앉아 담배를 태우며 수다 떠는 걸 보고, 쟤도 군대를 다녀왔겠지, 쟤도 연애를 해봤겠지, 쟤도 이별을 해봤겠지 하다가 관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