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따분하다는 말을 발견했다. 그렇다. 나는 따분하다. 왜 잊고 있었을까. 따분하다는 말을. 너에게서 찾았던 흥미도 갑갑한 안개가 자욱히 낀 것처럼 흐릿하다. 흰 백지에서 까만 질서를 찾아내는 일도 따분해서 미칠 것 같다. 너무나 따분해서 소소하게 재미 있었던 일조차 재미가 없어졌다. 이럴 바에는 아주 한적한 어떤 곳으로 가서 아주 따분하게 있고 싶다.
내 삶. 그리고 나. 나는 내 삶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지만 오랫동안 기력이 없었다. 딴에 어디선가는 무언갈 해보는 것조차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있다. 낯선 언어보다 흥미 있는 것을 찾고 싶어졌다. 아주 쾌락적인 것은 아주 허무한 것이어서 뛰어들고 싶지가 않다. 아주 고요하고 흥미롭고 싶다. 아, 따분해서 미칠 것 같다. 너가 그것이었구나. 너도 이젠 내가 따분해졌었구나. 왜 우리는 서로 그게 아니라고 해명해야만 할까. 시간이 지나면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라는 것을, 해명해야만 할까.
오늘은 솔직하고 싶은 날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분노 때문에 솔직할 수가 없을 것이다. 분명 과할 테고 분명 신경질적일 테고 분명 짜증스러울 것이다. 오늘은 네가 필요 없다. 습관 때문에 거짓된 심심함에 노출될 것이 뻔하지만 사실은 네가 필요 없고 부담스러운 날이다. 나는 너를 만나면 오늘 눈빛으로, 입으로, 손으로 죄를 지을 것만 같다. 따뜻한 너를 만나고 싶지 않다.
비가 쏟아진다. 말도 통하지 않고 회유되지도 않는 비가 무력하게 계속해서 쏟아진다. 의심도 없이 쏟아지는 비가 미운걸까, 좋은걸까. 나는 모순과 홧병을 동시에 가지고 태어난 불쌍한 인간. 남의 친절은 나에게 피해가 되고 나의 친절은 남에게 피해가 되고 나의 호의는 남에게 불편함이 되고 남의 유희는 나에게 불편함이 되고 선과 악, 흑과 백으로 나눌 수 없는 내 주변의 모든 모순은, 창과 방패가 서로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있는 나의 운명은 받아들일 수 없는 나에게 무조건 이해하라고만 하는데. 나는 그저 따분해서 화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