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생긴 마음이 있었다. 너무 못생겨서 나조차 그 마음을 외면하는 일이 많았다.
외면하는 이유로 그런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초자아가 너무 비대하다고. 그게 인간의 본연인데 너무 억누르려고 하는 것도 좋지 않으리라고. 하지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도 안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마치 그런 마음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마음에 대한 기만이다.
내 눈에 예쁜 사람 미운 사람은 당연히 있다. 어떤 사람은 숨 쉬는 것만 봐도 예쁘다. 어떤 사람은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신경이 곤두선다. 물론 언제나 나름의 이유가 있다. 보편적으로 가까이에 있는, 그런데 친하지 않은, 조금 더 인간에 대해 정보가 있는 상태일수록 후자에 가까운 것 같다.
문제는 인간사의 대부분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감정을 가질 때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본인이 옳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하니까 하는 말이다.
못생긴 마음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그 끝이 가리키는 먼 곳은 단 하나다. 나다. 투영의 관점에서. 그러니까 못생긴 마음은 나의 문제다. 물론 상대의 어떤 천성(마음이 작다, 소음이 많다, 비열하다 등)에서 그냥 생리적인 불편함을 겪는 일도 있다만.
요즘 나의 넷플릭스 왓챠 시청 목록은 엄청나게 다양하다. 조금 보다 이것저것 옮겨 다녀 난잡하다고 보일 정도. 멜로가 체질, 김 비서가 왜 그럴까, 또 오해영, 연애시대, 쌈 마이웨이, 진격의 거인, 성균관 스캔들, 브리저튼, 남극의 셰프 등. 봤던 걸 또 보기도 하고 추천받았다가 미루어 둔 걸 보기도 하고. 책도 그렇다. 이것 읽다 저것 읽다 말다 제멋대로다. 웹소설도 이것저것. 어제는 그 많은 리스트를 뒤로 하고 도라마 코리아도 들어가 봤다. 충족감에 대한 갈증의 반증인 듯하다. 인구 수만큼 고독이 있다는 대사처럼 인구 수만큼 서러움이 있다. 사람들은 서러움을 들여다보고 이해받길 원한다.
오해영은 이름이 같았던 예쁜 친구의 액받이 같은 삶이 서럽다. 지안은 자기 삶도 거지 같은데 가족에게 말없이 희생하는 아저씨가 애처롭다. 글 깨나 아는 윤희는 아픈 오빠 약값을 벌어야 하는데 조선시대에 여자로 태어나 서럽다. 애라는 마이크가 좋은데 스펙도 학벌도 없어 서럽다. 장르 로맨스의 대부분은 상대를 너무 사랑해서 서럽다. 창작 수업에서 모든 소설의 주제는 인간의 애환이라고 했다. 순수문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못생긴 마음은 모두 이야기의 출발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숨기고 싶은 못생긴 마음을 마주하는 과정은 최소한 인구 수만큼 그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