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반듯이 누운 외할아버지의 얼굴은 평온하여 죽음이 이다지도 가깝구나 싶으면서도 깊은 초월감을 주었다. 1920년대에 태어난 할아버지는 광복을 보았을 것이고 서울에서 6.25를 겪었을 것이다.
장례 도우미 아저씨가 할아버지가 아직 멀지 않은 곳에 계시고 귀가 열려 있다며 가족들에게 한 마디씩 할 기회를 주었다. 작은 이모는 가발을 벗겨낸 외할아버지의 민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귀에 대고 조용이 말했다. "사느라 애쓰셨어요, 아버지."
할아버지는 귀가 일찍이 쇠하고 눈도 점점 보이지 않았지만 죽는 날까지 정신만은 또렷했다. 작년인가 요양원에 갔을 때 할아버지는 내가 93세쯤 죽을 것 같아, 하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93세가 지나기 전, 음력 설을 앞두고 돌아가셨다. 내가 외할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장손을 이뻐하셔서 몰래 나이키 조리를 사다주었다는 말을 사촌언니에게 전해듣고 언니의 서운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게 가장 최초의 기억인 것 같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을 손에 든 것은 막내 손자였다. 조리를 받았던 장손은 미국에 살고 있고 미처 오지 못했다.
방학 때 엄마가 외갓집에 나를 맡겨두어 한 달 정도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집에 산 적도 있다. 내가 평소처럼 늦게 일어나니 쟤는 어디가 아픈가 왜 저렇게 오래 자냐, 하셨던 기억이 있다. 내게 여자는 약사가 최고의 직업이라고 알려 주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말에 귀담을 나이가 아니었던 것이 아쉬울 뿐이다.
할아버지는 손녀의 눈에 나름대로 인생을 즐기는 것으로 보였다. 장사를 그만둔 이후에는 비싼 가발, 보청기 등을 손수 구입하시거나 자식들에게 사달라 하셨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춤을 추러 다니셨고 몸이 쇠약해져 춤이 불가능해졌을 때는 꼬박꼬박 기원을 다니셨다. 엄마를 제외한 자식들이 모두 평탄하고 안정된 삶을 이어갔으니 두 분 모은 재산으로 집 한채를 산 후에는 내내 용돈으로 이것저것 즐기셨다. 외할머니는 남사스럽다며 일체 그런 것들을 멀리하셨고 두 분도 좁은 집 안에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지내셨다.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시게 된 것은 90세즈음 되어서였다. 할아버지는 화장실을 가다 쓰러졌고 다음날 방문도우미 아주머니에게 발견되었다. 담배도 티브이도 없는 공간을 극구 거부하며 혼자 버티셨지만 그때 가서는 어떤 수치심과 패배감이 외할아버지의 고집을 꺾었다.
외할아버지는 그렇게 외할머니의 맞은편 방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나는 가끔 궁금했다. 외할아버지에게 담배도 티브이도 춤도 바둑도 산책도 없는 삶은 어떤 것일까. 자는 듯 아닌 듯 묵묵히 침대에 누워계신 모습만으로는 그 내면을 알 수 없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우리가 태어나고 쑥쑥 자라서 어른이 된 탓인 것 같아 괜스레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천진한 얼굴로 뛰어다니는 두살배기 조카들을 보고 그 녀석들이 크면 내가 죽는 거겠지, 하고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문득 할아버지가 통과한 과거의 무게를 들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자식들에게 부담을 지우려는 태도가 없었던 분들의 깔끔한 태도가 새삼 아쉬웠다. 진짜 무게감 있는 슬픔을 그분 자식들에게 넘겨드리고 조금 침통한 마음으로 다녀왔다.
나에게 예고된 가장 가까운 예상가능한 죽음을 상상하며, 쑝이 죽고 너무나 슬프고 허전하더라도 잘 죽는 것의 복에 대해 곱씹어야지 하고 다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