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너무 아끼거나, 너무 사랑하거나, 너무 애처롭거나, 너무 아프거나, 너무 존경스러울 때 너무 혐오스러울 때, 너무 무서울 때, 너무 화가날 때 등등 감정이 벅차오르는 대상을 만나면 오히려 언어로 그것을 잘 표현해내지 못한다.
이것이 논리를 동반하는 것이 아니며, 언어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쩌면 언어적 능력의 한계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아버지'라는 단어를 만나면 그렇다.
떠올리기만해도 벅차오르는 그 이름, 아빠.
학교에 놀러갔다가 2009년 달력을 얻었다. 그러고보니 4년동안 학교에 다니며 한번도 집에 학교달력을 걸어놓은 적이 없었다. 잘 안가기도 했고, 귀찮아서, 깜빡 잊어서 등등 그 이유는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달력을 볼 때나, 또 어떤 사소한 것을 볼 때 그것을 아빠에게 가져다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나, 마음 아픔은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그러한 소소하고 작은 일들이 항상 예민하게 방심하고 있는 나의 폐부를 찌르고 도망가곤 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쫓아낸 것일지도.
09년 새해, 아버지에게 학교 달력을 전해드리자 아빠가 정말 사소하게 기뻐했다.
'아 이번 년도에는 달력 없이 살아야지, 했는데 잘됐네.'
그 감정의 오고 감이, 또한 사소하지 못했다.
늙어가는 아버지와 다 자란 딸 사이에는 사랑이나 능숙한 대응만으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깊은 강이 있는 것만 같다. 아버지는 집에 잘 들르지 않는 딸에게 많이 서운하고 때로는 너무나 외로워 원망스러울텐데도 그 사랑을 멈추지 않고, 딸은 관념속에서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부르짖을 뿐 자기 앞에 놓인 삶밖에는 보지 못한다.
그럼에도 둘의 사랑은 진행되고 있다. 서로의 존재를 아낌없이 응원하는 일이 자연스럽다.
단지 유전자를 공유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버지는 단지 딸의 유년시절을 지켜봐왔던 사람이고
딸은 아버지의 청춘이 흘러가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일 뿐인데
나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심장이 뜨거워진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