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릴 수도 있다

Posted 2012. 10. 19. 08:34 by 바보어흥이

예감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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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간극이 점점 벌어지는 일도 나이가 들어가는 것의 반증일까.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깨닫는 게 많아지지만 그것이 곧 행동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예컨대 꼰대가 꼰대가 싫다고 하면서 자신의 꼰대성을 부인하려는 것이나 아부하는 사람은 필요없다면서 아부하는 사람이야말로 자신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사람들이 성숙하지 못하다고 질타하면서 자신의 철없음을 간과하는 것, 사회주의와 마르크스를 논했던 젊음을 자랑하면서 부동산 투기를 동시에 호기롭게 이야기하는 것, 진보적인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문제에 대한 발언은 뚜렷하면서 직장생활은 보수적이고 개인적인 욕망에 가득찬 것. 요즘은 나에게 회의가 든다. 가지지 않았을 때, 그야말로 나설 일이 없을 때 평소의 가치관을 내세우기란 얼마나 쉬웠는지, 그래서 아웃사이더의 발언이 얼마나 편리한 것인지 말이다. 반대로 포기를 감당하며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용기 있는 것인지-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알게 되었다. 대체 나는 얼마나 비껴나고 있는 것인지 직시할 필요를 느낀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규정하는 것과 비춰지는 자기가 얼마나 다른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볼수록 섬뜩하다. 그것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

 

 

예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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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을 돌보는 분위기는 이제 내 나이 또래에서 미덕이 아닌 듯하다. 또래집단이 곧 세상인 나이가 지나버리고 학생이라는 신분의, 혹은 어리다는 것에 대한 한없는 찬양 등의 사회적 보호망에서 차츰 벗어나면서 개인은 점점 불안하고 각박해진다. 무작정 삐댈 부모도 점점 작아지고, 발을 한번 헛디디면 어디까지 추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커지면서 서로에 대해 아주 조금씩 무자비해진다. 무자비함의 원천은 물론 자신이다.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나, 상대방을 아끼는 마음보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기제가 먼저 작동한다. 심지어는 아주 자명한 사실에서도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타인에게로 탓을 돌리려는 합리화를 강하게 추구한다. 그러면 본인이 그것을 진실이라 여기기 때문에 그것이 진실'처럼'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것을 바로잡아줄 어른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른은 스승일 수도, 부모일 수도, 믿는 친구일 수도,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존경하는 위인일 수도 있다. (나는 가끔 이 시대에 어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어른을 필요로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곤 한다. 그 정도로 사람들은 스스로 모두 잘난 것이다.) 

문제는 다 살자고 하는 짓이라는 것이다. 나 살자고 남을 모른 척하고, 나 살자고 남을 밀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간절히 느낀다. 나의 감수성으로는 지금이 약 10도 정도 더 무자비한 온도라고 느껴진다. 더 무자비하게 살아남는 것이 이 사회가 바라는 자기계발적 성공인 것 같긴 하지만 나는 그것이 옳지 않다고 느껴진다. (물론 나는 이 지점에서 매우 좌절감과 열패감이 든다.) 그저 예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