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Posted 2013. 7. 2. 11:47 by 바보어흥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90초에서 4분 사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불현듯 환한 얼굴(실제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기억의 왜곡일수도 있다)을 하고 계단을 내려오는 한 얼굴이 생각난다. 아, 저 사람이었구나 하고 생각했을까. 처음 입사했을 때 사람들은 내 전공을 듣고 자꾸만 그 사람을 이야기했다. 알고 보니 내 지인도 그를 알았고, 내게 그 말을 전해준 사람도 알고 보니 친하지 않은 동문이었다. 이상한 우연이 겹쳐서일까. 전공이라는 교집합 때문에 친근함이 든 걸까. 나는 자꾸만 내 자리와 멀기도 먼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가끔씩 담배를 태우고 있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오래 사귄 여자친구도 있다는, 내 얼굴도 잘 쳐다보지 않는 그에게 나는 어색하게 자꾸 말을 걸었다.

어느 날엔가는 당돌하게 술을 사달라고 했더니 그러겠단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술을 엄청 좋아하니까. 그러고도 괜히 "술 사주신다면서요" "그러게요, 언제 시간돼요?"하며 기약없는 농담만 주고받는 나날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진짜로 술 약속을 잡은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어느 날 옥상에 올라갔더니 그는 울고 있었다며 나를 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어색함을 감추려고 억지로 말이다. 여자친구를 놓치고 싶지 않단다. 속으로 되게 웃기다고 생각했다. 이미 떠난 연인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절대로' 집착하지 않고 그냥 보내주는 거라는 것 정도는 그 나이 먹으면 다 알고 있지 않나? 나는 그때 한창 듣던 지디의 스토커 노래를 들어보라고 했다. 당시 나는 그 노래를 반쯤은 코미디로, 반쯤은 원색적인 맛에 즐기고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도 그에게 교훈을 전달하기에는 그만한 노래도 없었을 것이다. 노래의 내용은 어떤 여자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죽이게 되는, 뭐 그런 스토리였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 진짜로 술 약속을 잡았다. 그날 너무 많이 마셔서 기억은 잘 안나지만 서로 지난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계속 그 화제로 대화를 나눴으니까. 그때 확실히 알았다.

 

그 후에도 다양한 그의 얼굴을 무수히 보았지만 나는 가끔씩 그때, 그 계단에서 내려오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나는 그에게서 나와는 정말 다른 단호함 같은 걸 보았던 것 같다. 외적으로 전혀 꾸미지 않은(못한?), 그야말로 담백한 외양 속에 심성이 올곧은, 청년 하나를 보았다고나 할까. 약 1년 반이 지난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하면 그 외의 다른 이면도 많이 알고 있으니 더 복잡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말로 순간의 그 장면이 내게 주는 인상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나를 지배하고 있다. 나는 어쩌면 그 찰나에 무언가를 내주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