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에 몸담은 기간이나 경력은 미천하기 이를 데 없지만 책에 관한 생각의 변화는 생겼다. 바로 '이 시대의 책'에 대해 더 현실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책이야말로 더할나위 없는 스승이라는 게 보편적인 진리이지만 범박하게 말하자면 독서에도 '급'이 있다.
이 시대의 모든 재화 중 상품이 아닌 것을 찾기란 그야말로 한양에서 김서방 찾기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상품의 목적이 어디에 더 가까운가를 따지는 것은 필요하다. 책도 마찬가지다. 책은 스승이지만 동시에 상품이다. 우리는 상품의 옷을입고 탄생하신 스승님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뼛속까지 그저 상품이신지, 옷만 상품이신지 말이다.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생각보다 신성하지 않다. 여느 사업과 마찬가지이다. 돈이 될만한 책이 목적인 것이다. 진리를 전하는 책, 시대의 지식을 선두하는 책 등의 피상적이고 우상화된 가치를 일단 접어두고 가장 책을 많이 사는 연령대를 타깃으로 잡아 그들의 가장 보편적인 취향을 골라 책을 기획하는 것, 한마디로 팔릴만한 조건에 끼워맞추는 것, 그것이 책의 대부분의 탄생과정이다. 그 자체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을 나쁘다고 하려면 책을 상품화시킨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전제가 붙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당신이 출판사 사장이라면, 어떤 책을 내고 싶겠는가?
지금 대형서적에 매대에 깔려있는 그 많은 책들은 대부분 그렇게 탄생한다. 출판사는 나도 책좀 읽으며 산다고 자랑하고 싶은 독자들의 숨은 심리를 파고들어 흥미롭고 쉽게 읽을 수 있을 만한 책들을 고르고 고른다.
그러나 나는 지금 책의 종말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그중에도 더 큰 뜻을 품고 책을 펴낸 사람들이 있다. 책을 낸 후 통장 잔고부터 확인하는 사람 말고 더 먼 미래를 보고 책을 내는 사람들. '좋은 책'으로 돈을 벌고 싶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돈은 됐고 더 많은 독자들에게 올바른 가치를 알리고 싶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그 양상은 여러가지가 될 것이다.
자본주의의 유통구조 안에 있는 책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독자뿐이다. 독자들이 더 좋은 책, 스승이 될 만한 책, 생명력이 긴 책을 선호하기 시작할 때 출판시장은 그 쪽으로 변화한다.
좋은 스승을 알아보는 좋은 제자가 많아질 때 스승님들의 질적향상이 이루어진다는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