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Posted 2016. 12. 31. 15:41 by 바보어흥이

내가 머무는 숙소는 치앙마이 대학교 후문에서 멀지 않다. 카페에 앉아 있으면 학생들을 많이 보는데 여느 대학생들이 그렇듯 치앙마이 대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한껏 멋을 부리고 담배를 태우며 카페에 앉아 수다를 떤다. 스포츠형 조리나 운동화, 올이 풀린 청반바지, 투블럭컷, 무릎이 찢어진 청바지나 나이키 티셔츠, 건들거리는 제스처까지 대학생들만의 특권, 즉 배움이라는 안전함을 놓지 않으면서도 제멋대로 굴겠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그들의 대화에는 리듬감 넘친다. 성조가 다섯 가지나 되기 때문일까. 한 문장 안에도 오르내림이 가파르다. 알아들을 수 없기에 낯선 장소가 주는 매력이 공고해진다.

치앙마이의 1월은 멋쟁이들에게 최적의 계절이다. 여름에 놀러왔을 때는 볼 수 없었던 니트소재의 가디건은 물론이고 야상자켓, 다채로운 색의 바람막이를 입은 사람들이 보인다.

날씨는 좋지만 멍 때리고 산책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인도의 개념이 한국과 달라 핸드폰을 보며 걷다가는 십중팔구 걸림돌에 걸린다. 매가 넘어질 뻔하는 모습만 동영상으로 다 찍어 모아 편집했다면 제대로 웃긴 동영상 하나가 완성됐을 것이다. 인도를 침범하는 것들은 대부분 노점상에서 펼쳐놓은 테이블과 의자들, 주차된 차나 오토바이, 대개 서른 걸음에 한 번씩 차가 드나드는 골목 때문에 끊겨버리는 높은 턱, 꿈쩍도 하지 않고 죽은듯이 자고 있는 큰 개들이다. 마주오는 사람들은 서로 순서를 지켜 좁아지는 구간을 지난다. 그들의 자연스러운 몸짓을 보면 이런 장해물들이 전혀 불편하지 않은 듯한 착각마저 든다. 아스팔트가 모두 깔려 있음에도 바닥에는 예상치 못한 진흙, 노점상에서 버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들도 피해다녀야 한다. 커다란 쥐나 바퀴벌레도 종종 사람을 놀라게 한다.

하지만 울창한 나무가 만들어주는 시원한 그늘과 깨끗하고 파란 하늘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런 불편함 정도는 사소하다. 춥지도 덥지도 않는 적당한 온도와 어디에서나 관광객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 도시의 편안함을 생각한다면, 어디를 둘러봐도 충만함이 가득한 이미지를 기꺼이 즐길 수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나는 해야 할 일이 없다.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롭다. 가끔 스스로의 채근에 못 이겨 가이드북에서 추천하는 관광지로 나서긴 하지만 한 달이라는 시간을 생각하면 급할 것이 없다. 그저 조금만 걸어 나가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일과로 충분하다.


이곳을 오기전에 한달 간 집을 비우기 위해 일주일 내내 바빴다. 옷방에는 안 입는 옷이 너무 많았고 책상방에는 쓰지 않는 물건이 너무 많았으며 거실은 뒤죽박죽으로 얽혀 있는 듯했다. 나는 휴직이 시작되자마자 안방에 있던 책장을 거실로 옮겼다. 시작하자마자 후회하긴 했지만 끝나고나니 그럭저럭 [책과 집] 표지 같은 풍경을 얻을 수 있었다. 옷방의 행거와 서랍을 뒤져 안 입는 옷들을 정리하고 책상방을 정돈하기 위해 이케아 광명점에 두 번이나 들러 선반을 사왔다. 일주일쯤 지나자 그럭저럭 집이 예뻐보이기 시작했다. 매는 내가 쉬자마자 너무 바쁘다며 종종 불만을 토해냈다. 하지만 텔레비전을 안방으로 옮기고 나자 안락함이 극대화되어 거의 움직이지 않고도 하루를 행복하게 보낼 여건이 완성되었고 곧 둘 다 크게 만족할 수 있었다.

떠나기 직전에는 12시간에 한 번씩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하는 첫째 고양이의 짐도 빠짐없이 챙겨야 했다. 고양이 두 마리의 짐을 다 싸고나니 거의 쌍둥이 신생아의 짐을 옮기는 수준이었다. 모래, 사료, 간식, 방석, 장난감, 인슐린, 주사기, 알콜솜, 혈당체크기, 채혈침 등 한 달을 써도 모자람 없는 분량을 준비했다. 빠짐없이 아빠 집으로 옮기고 주사를 놓기 위한 주의사항 등을 설명해주었지만 해도 해도 끝이 없었고 걱정이 되었다. 아빠 집에 주차를 해두었기 때문에 이웃들과 불화를 겪을까 걱정이었고 쑝에게 한 달이나 혈당체크 없이 인슐린 주사를 놔도 될지도 큰 걱정이었다. 추운 날씨 때문에 보일러가 얼지나 않을까 걱정되었고 여행지에서 급하게 비상약을 구하지 못할까, 캐리어가 15키로를 넘어 추가요금을 물게 되지는 않을까 몇번이고 체중계로 무게를 재곤 했다.


어디에서든 사소한 일로 싸우게 마련이지만 우리는 그럭저럭 평온함을 깨지 않기 위해 조심하면서 잘 지내고 있다. 종종 그런 얘기를 한다. 그 사건이 없었다면 이런 행복을 누리지 못했을 거라고. 물론 이 대화에는 상반된 욕망이 겹쳐져 있다. 한달 간 치앙마이에서 살기로 한 큰 결심 뒤에는 그만큼 참을 수 없는 불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급작스럽게 둘 다 직장을 다녀도 될지 고민했고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난감했다. 이렇게 크게 명예를 손상당해도 살아갈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혼란스러웠고 그저 파괴된 일상을 회복하느라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할 만한 선택을 해야 했다.


아무리 불합리한 일을 겪어도, 살아갈 수 있다. 지금 읽고 있는 폴 오스터의 [환상의 책] 주인공은 아내와 두 아이를 비행기 사고로 잃고 나서 헥터 만이라는 무성영화 주인공에 대해 책을 쓰며 살아갈 힘을 얻고 있다.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은 아니니까. 충분히 극복해낼 수 있다. 그저 천천히, 잘못된 길로 접어드는 것을 최대한 조심하면서, 조금은 몸을 움츠리고 걸어나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