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의 비

Posted 2017. 1. 10. 19:21 by 바보어흥이

의외로 비가 많이 오는 태국의 겨울이다. 오기 전에 알아본 바로는 거의 비가 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빠이를 다녀온 이후부터 하루 건너 이틀씩 비가 온다. 비가 오면 행동의 제약이 커 자주 가는 카페 야외에 앉지 못하고 콘도 내 테이블에도 앉지도 못한다. 어디 멀리 나가기도 귀찮아져서 그냥 집에 있곤 하는데 이전 peer의 숙소와 다르게 이번 weerin의 숙소는 같은 콘도 내 숙소임에도 불구하고 1층이라 해가 잘 들지 않고 습한 편이다. 안락한 느낌이 들지 않으니 보통은 미드를 보며 시간을 죽이게 된다. 한국이나 태국이나 어디 안 가고 가만히 있으면 점점 다운되고 죄책감이 슬며시 스며들게 되어버려 오늘은 오후 4시무렵에야 꾸역꾸역 콘도 옆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roastiniyom 카페 커피가 맛있어서 계속해서 커피를 사발로 들이키는 길모어 걸스 모녀를 보다 보니 커피가 간절해진 것도 사실.


드디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의 부채감에서 벗어났다. 끝까지 완벽한지 살피고 또 살피는 것이 괴로워서 어제 눈 딱 감고 보내버렸다. 이제 내 시간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다. 오늘은 현대카드에서 카드 재발송 건으로 연락이 왔지만 일단 무시하고 볼 예정이다.


폰에서 카톡 알림이 오지 않은지 꽤 되었지만 아직도 그대로 방치한 탓에 생각날 때마다 카톡을 열면 한국 친구들의 묵은 메시지들이 쏟아진다. 전라선 ktx 예매일, 출산을 대비해 구매한 아기용품, 기르고 싶은 종의 강아지 사진, 잘 지내냐는 안부, 기획 제안 거절 등. 우리가 어디에 있든 각자의 삶은 가장 나은 방향을 찾아 흘러가고 있다. 


아직도 금붕어 식당을 가지 않았다. 치앙마이라는 낯선 공간에 옹기종기 모여 카페를 하고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식당을 차린 사람들의 하루를 엿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계획한 일정인데 금붕어 식당이 문 닫는 날이 의외로 많기도 하고 오토바이를 빌리기에는 날씨가 안 좋은 날이 번갈아가며 이어지고 있다.


도도새가 집에 와 있다. 작업실로 사용 중이지만 같이 있었더라도 참 좋았을 것 같다. 도도새는 가족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녀에게는 각자의 사연으로 삶이 버거운 캐릭터들이 넷이나 있다. 둘째의 역할이 그러하듯 아래위의 교두목이 되어 그들의 삶을 삶답게 지탱하려 노력하는 것도 도도새다. 도도새를 둘러싼 장해물들은 그때그때마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데 그래도 도도새는 하고 싶은 것을 해나가려고 무진장 애를 쓴다. "나는 돈을 밝히며 살 거야." "동남아에서 소소하게 살고 싶어" 등 모순되는 욕망이 가득한 도도새를 볼 때면 나의 한 지점을 보는 것 같다. 오늘 세운 우리의 계획은 도도새를 성공시킨다음 매를 성공시킨다음 나는 거기에 빌붙어 사는 것 이외에도 수잔손택 같은 외모로 늙기 등이 있었다. 

 

내가 바라는 삶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사실은 치앙마이에서 할 수도 있고 서울에서 할 수도 있는 하루들이다. 다만 그 계기를 만드는 게 조금 어려울 뿐. 내가 여기에서 결심한 것 중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일상에 침투시키는 것. 나는 때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사소한 결심도 필요하다. 집을 예쁘게 꾸미고 온 것도 그런 노력 중 하나다. 싫어하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기 위해 더 단순해지고 싶다. 제거하고 또 제거하다 보면 가능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