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을 단순히 커다란 고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지나치게 큰 고통은 우울증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슬픔은 상황에 걸맞은 우울함이지만 우울함은 상황에 걸맞지 않은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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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증 우울증을 이루는 것은 삶의 덧없음과 한계에 대한 이러한 예리한 인식이다. (26)
덩굴식물의 무게가 사라져도 대개의 경우 나무에겐 넘어지지 않을 만큼의 뿌리는 남아 있고 드문드문 남은 잎들이 필수적인 영양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훌륭한 삶도, 강한 삶도 되지 못한다. 우울증에서 벗어난 뒤 재건하기 위해서는 사랑, 통찰력, 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간이 필요하다. (30)
대부분의 환자들은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자신이 왜 병에 걸리게 되었는지 아는 것이 병의 치료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데도 말이다.
마음의 병은 진짜 병이다. 이것은 몸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 호흡 곤란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아무 이상도 없습니다. 폐기종 때문이지요!" 하면서 넘겨 버릴 의사는 없다. (31)
화학적이란 단어는 사람들을 죄책감으로부터 유쾌하게 해방시켜 준다. (32)
경험과 화학 작용의 카오스 아래 금맥처럼 순수하고 분명하게 깔려 있는 본질적인 자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변할 수 있으며,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서로에게 굴복되거나 서로를 선택하는 자아들의 연속체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33)
우리는 젊은 혈기에 누가 더 절벽 끝으로 다가가서 사진의 포즈를 취할 수 있는지 시합을 했다. 모두가 선 자세보다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더 다가갈 수 있었고 절벽 끝에 가까워지자 현기증과 함께 마비 증세를 느꼈다. 나는 우울증이란 것이 대개는 우리를 벼랑 끝 너머로 보내는 것이라기보다는 벼랑 끝으로 바싹 끌어당겨서 너무 멀리 갔다는 생각에 공포에 젖어 현기증으로 균형 감각을 완전히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43)
솔직하게 인정하기로 하자. 우리는 무엇이 우울증을 유발하는지 모른다. 우울증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왜 특정한 치료들이 우울증에 효과적인지도 모른다. 우울증이 어떤 진화 과정을 거쳐 왔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에겐 아무 문제도 없는 상황에서 왜 어떤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의지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도 모른다. (45)
캄보디아 폴포트의 크메르 루즈 정권 속 팔리 누온. 잊는 법, 일하는 법, 긍지를 지니는 법(53~57)
미래에 우리 인간은 화학적 조작을 통해 두뇌의 고통의 회로를 찾아내어 그것을 통제하고 제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영원히 그렇게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그것을 제거하는 것은 경험을 무미건조하게 만들고 복잡성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고통받는 능력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평생 막연한 슬픔 속에서 살 것이다. 그러나 고통과 심한 우울증은 다르다. 사람은 격심한 고통 속에서도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으며 살아남을 수 있다. 내가 근절하고자 하는 것은 우울증으로 인해 살아 있는 시체처럼 살아가는 것이며 이 책도 그런 목적을 위해 쓰인 것이다. (59)
세로토닌 수용체의 감소,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솔 증가, 우울증이라는 세 가지 현상은 동시에 일어난다. 그 순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처럼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동물의 뇌의 세로토닌 체계를 손상시키면 코티솔 수치가 높아진다. 코티솔 수치를 올리면 세로토닌은 내려가는 듯하다. 어떤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주면 부신피질자극호르몬분비호르몬(CRH)이 증가하여 코티솔의 수치가 높아진다. 어떤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면 세로토닌 수치가 내려간다. (88)
스트레스로 장기간 코티솔 수치가 증가하는 현상이 발생하면 코티솔 체계가 손상되어 나중에는 일단 코티솔 수치가 증가하기 시작하면 쉽게 중단되지 않는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가벼운 충격에는 코티솔 수치가 증가했다가 이내 정상화되지만 코티솔 체계가 손상된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어느 것이나 그러하듯 코티솔 체계도 한번 무너지면 작은 충격에도 다시 무너지기가 쉽다. (90)
우울증 상태에 오래 머물수록 심각한 손상을 입을 확률은 커지며 말초신경 장애가 일어나 시력이 저하되고 온몸에 장애가 올 수도 있다. "이것은 단순히 우울증이 발병했을 때 치료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재발을 예방해야 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반영한다. 현재 우리의 공중보건학은 잘못된 접근을 하고 있다. 재발성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약물치료를 중단해서는 안 되며 영원히 계속해야 한다..." (92)
"아내는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요. 그녀는 나를 그냥 내버려 두는 법을 배웠지요. 고마운 일이지요." 그러나 대개의 가족들과 친구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너무 관대하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을 완전히 무능력자가 된 것처럼 취급하면 그 사람 자신도 스스로를 완전한 무능력자로 보게 되며 결국 그는 진짜 무능력자가 되어 버린다. ... 우울증 환자에게 어느 정도까지 관대할 것인지에 대한 바람직한 기준을 정하는 것이 환자를 위해서나 가족을 위해서나 꼭 필요하다. "우울증 환자의 가족들은 절망에 전염되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합니다." (96)
중증 우울즐의 첫 삽화는 대개 생활사건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지만 두 번째 삽화로 가면서 관련성이 적어지고 네 번째, 다섯 번째쯤 되면 생활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어진다. 스트레스 중에서 으뜸은 굴욕감이고 두 번째는 상실감이다. 생물학적 취약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최선의 방어책은 외적인 굴욕들을 흡수하고 최소화하는 '행복한' 결혼 생활이다. (97)
우울증은 불안증세들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불안증과 우울증을 따로 다룰 수도 있지만 불안증 분야의 손꼽히는 전문가인 사우스캐롤라이나 의과대학 제임스 밸린저는 그것들을 "이란성 쌍둥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조지 브라운은 간명하게 "우울증은 과거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고 불안증은 미래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라고 설명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두려움에 대한 슬픔의 관계는 희망에 대한 기쁨의 관계와 같다고 했듯이 불안증은 우울증의 전조다. (100)
우리는 자신에게 벅찬 기준들을 갖고 산다. 나를 길러 낸 기준들과 나 스스로 정한 기준들은 일반적인 세상의 기준들보다 훨씬 높아서 나는 책을 쓸 수 없으면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판단한다. 어떤 이들의 기준은 그것보다 훨씬 낮고 어떤 이들의 기준은 훨씬 높다. 조지 부시의 예로 들자면,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자유 세계의 지도자 노릇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문제가 생긴 것이다. (136)
우울증 치료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데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심리치료talking therapy와, 약물치료와 전기충격 치료(ECT)를 아우르는 물리적 처치가 그것이다. 우울증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이해와 정신약리학적 이해를 조화시키는 건 어렵지만 꼭 필요한 일이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보는 건 지극히 위험하다. ..."나는 우울증의 원인이 사회심리학적인 것이라고 해서 사회 심리학적 치료를 해야 하고 생물학적인 것이라고 해서 생물학적인 치료를 해야 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152)
사실 프로이트의 모델은 (결점은 있지만) 훌륭하다. 루어만의 표현을 빌자면, 거기엔 "인간의 복잡성과 깊이에 대한 인식, 자신의 거부들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는 절박한 요구, 인생의 힘겨움에 대한 존중"이 들어 있다. (...) 인간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동기들에 모르는 경우가 많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의 포로라는 그의 글의 기본 진실을, 그의 숭고한 겸손을 간과한다. (154)
화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가족의 죽음으로 인한 우울증이나 2주간의 불장난의 후유증으로 오는 우울증이나 특별히 다를 게 없다. 후자보다는 전자의 경우에 보이는 극단적인 반응들이 더 합리적으로 여겨지긴 하겠지만 임상적인 체험은 거의 동일하다.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