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ergency holiday

Posted 2017. 1. 2. 12:57 by 바보어흥이

어제는 하루종일 비가 와서 선데이 마켓을 가지 않았다. 치앙마이에 와서 맞이하는 두 번째 일요일에도 선데이 마켓을 가지 않은 셈이다. 오자마자 우아라이마켓을 다녀왔기 때문에 더 간절하지 않았던지도 모르겠다.

태국의 겨울비는 마치 한국의 가을비 같다. 매번 여름휴가 때 왔으니 내가 아는 태국 비는 무조건 스콜이었다. 추적추적 하루종일 내리는 비는 태국과 어울리지 않았다. 낮게 하늘을 뒤덮었던 구름이 어둠 속에 완전히 잠기고 나서야 비가 거의 잦아들었다. 하루 종일 책을 보고 미드를 보고 낮잠을 자고 싱크대 찬장과 냉장고를 털어 요기를 했다. 하루 종일 게을렀던 덕분에 나는 보던 시트콤을 시즌3까지 다 보았다. 아쉽게도 시즌 4는 아직 넷플릭스에 올라오지 않았다. 창문에 손가락을 크게 찧은 것이 가장 큰 사건이랄까. 솔직히 '어라, 생각보다 아프네' 싶긴 했는데 피가 너무 많이 나서 새삼 놀랐다. 엄살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잠깐 들었는데 그에 걸맞게 다치고야 말았다.

저녁거리를 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숙소를 나섰다. 우산을 하나 들고 갔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필요가 없었다. 편의점에서 나도 모르게 냉동만두 생각이 났다.


확실히 이 도시에는 한가로움이 배어 있다. 방콕과는 또 다른 분위기다. 오늘은 처음으로 수영장 옆 클럽하우스에 자리를 잡았다. 해가 다시 나기 시작해 수영장 물이 반짝인다. 치앙마이의 하늘에는 특히 낯선 새들이 많다. 지금도 검은 털에 부리만 노란 새가 시끄럽게 울고 있다. 비둘기가 와서 수영장 물로 목을 축이고 가기도 한다. 이 콘도의 좋은 점은 수영장이나 헬스장뿐 아니라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한적한 공간이 많다는 것이다. 담배만 조절할 수 있다면, 카페에 가지 않고도 아무데서나 자유롭게 머물 수 있다. 지금 내가 있는 수영장 옆 클럽하우스나, 타워 B동 앞에 있는 5개의 테이블도 거의 자리가 비어 있다. 처음 숙소에 왔을 때는 머리가 벗겨진 서양 남자가 항상 아침부터 저녁까지 B동 앞 테이블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우리는 그를 알랭 드 보통이라 불렀다.


요즘 나는 시간에 완전히 무감각하다. 요일 개념도 없다. 해가 뜨고 지는 것 정도를 감각하고 있다. 애초에 계획한 한 달이라는 시간이 어느 정도일지도 잘 모르겠다. 벌써 치앙 마이에 온 지 열흘이 넘었다. 1/3 정도가 지나갔지만 아직도 20일이나 남아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느긋해진다. 가끔 집을 생각하다가 쑝과 꾸가 그립고 근거없이 마구 불안해지는 마음에 늦은 밤 아빠에게 영상통화를 걸기도 했다.


통장의 잔액을 몇 번이나 확인하면서, 사직서를 제출하고 막막해하면서도 내가 이곳에 올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은 날씨가 아닐까 싶다. 어제 비가 와서 하루 종일 집에 있을 때 깨달은 것은 날씨가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다는 것이다.


이 적당한 온도와 적당한 바람, 맑은 하늘과 새소리, 그리고 8시부터 7시까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어떤 사회적인 관계망도 없는 이곳이 내가 5년간 쉬지 않고 일한 이유여도 되지 않을까. 가끔씩 마음을 덜컹거리게 하는 것들, 아직 쓰지 않은 이력서, 반송 메일을 걸어두지 않은 것, 부재중통화에 모르는 번호가 뜨는 것들을 완전히 잊을 수 있는 순간들이 꽤 오랫동안 지속되며 이는 한없이 나를 느슨하게 만든다.


이 한 달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어떤 한 달이 될지 모르겠다. 또 돌아갈 때 마치 한 계절을 머물렀던 기분일지, 잠시 한 일주일 다녀온 기분일지도 모르겠다.